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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에세이] 아싸 두 마리

인권옹호팀 양성민 | 2022-07-27 | 조회수 : 407


아싸 두 마리

 

인권옹호팀장 양성민

 

나는 그렇게 많은 집회에 참가하지도, 집회에 참가해서 그렇게 선두에 서본 적도 별로 없습니다. 일단 말라깽이 외형에 왠지 얼굴 표정도 우울감과 동정심을 자아내기에, 웬만해선 나에게 선두에 서 보라고 말한 사람도 없고, 스스로도 겁이 많아 위험한 집회에 잘 나가지도 않았을 뿐더러, ‘절대로 앞줄에 서지 말라는 어머니 말씀만은 (다른 말은 하나도 안 들으면서도 그건 새겨들어) 행동에 옮겼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살아온 역사가 또 그리 험악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은 참여한 집회에서 어리버리 정신 줄을 놓고 있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징역 16개월을 선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초범이고 아직 학생 때라 판사님은 집행유예 2년을 함께 선고해주어, 다행히 징역을 직접 살진 않았습니다만 두 번에 걸쳐 유치장에 갇혀있어야 했고, 그 경험은 딱히 좋은 기억이 되진 않았습니다.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치상. 여러 종류의 죄목 중 가장 앞에 있는 죄목입니다. 풀이해서 말하자면 무기를 들고 공무원을 공격해서 상해를 입혔다는 죄목입니다. 무시무시합니다만, 하늘에 맹세코 억울합니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에서 신입죄수가 여러분들은 어떤 일로 감옥에 들어오셨습니까?”라고 묻자 주인공이 몰랐어? 여기 모두가 누명을 쓰고 들어 온 거야라고 답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는 이런 농담이 아니라 진짜이고 억울했습니다. 사건의 진실은 무기를 들고 공무원을 공격해서 상해를 입혔다는 것이 아니라 무기를 든 공무원에게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 끌려갔다가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20년 전의 사건이지만 아직까지도 죄명에 대해 억울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물론, 80년의 광주도 아니고 2000년도의 울산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제가 평화롭게 길을 지나다가 이유 없이 경찰에 맞고 끌려간 것은 아닙니다. 집회에 참가했고, 도로점거가 있었고, 돌멩이를 던졌고, 달려오는 경찰을 몸으로 막아 보시겠다고 호기롭게 나섰다가 경찰의 장봉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것입니다. 경찰들에게 나름의 체포이유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조사과정에서 내가 돌멩이를 던졌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내가 던진 돌멩이는 절반도 날아가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졌다는 건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었습니다. 어쨌든 나는 돌멩이를 던졌고, 어느 경찰이 다쳤으니, 던진 놈은 모두 책임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뭐 법이 그렇다는데. 우짜겠냐마는, 당시에 다친 경찰이 돌멩이에 다친 건지 다른 것으로 다친 건지 진단서나 사진이라도 한 번 보자고 항변하지 못한 것이 좀 아쉽긴 합니다.

 

20년 전 이미 끝난 재판에 대해 왈가왈부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세월도 흘렀고, 나도 인생을 살아가며 한번쯤 국가의 폭력과 대기업의 횡포에 맨몸으로 맞서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쓸 만한 공인인증 기록이자, 술자리 자랑거리도 되고 하니, 꼭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문제는 체포의 과정입니다. 로마병정과 같은 육중한 방패 뒤로 숨어 있다가 냅다 머리를 가격한 1미터 20센티의 장봉. 그거 한방을 맞고 나니 땅이 직각으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몇 번의 발길질과 구타가 있었지만 도무지 아픈 느낌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들이 유명한 서울 시경 1기동대였습니다. 1001.1002.1003이라 적힌 방패를 든 무시무시한 시위진압부대였습니다. 한방에 나가떨어진 어리버리한 말라깽이가 한참 지나서 정신을 차려가는 무렵. 곤봉을 든 쪽인지, 방패를 든 쪽인지 누군가 외치는 한마디가 들렸습니다.

 

아싸, 두 마리~”

 

그렇습니다. 두 마리였습니다. 두 명도 아니고. 두 놈도 아니고.

제 옆에 있던 갓 스물쯤으로 보이는, 그 또한 어리버리해 보이던 친구도 아마 누워 있나봅니다. 대도시의 10차선 백주대로 한가운데에서 다친 짐승처럼 길게 누워서 고통에 눈도 뜨지 못하고 그렇게 몇몇의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두 마리를 잡아서 두둑한 실적을 세운 시위진압병사는 포상휴가라도 가게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의 쾌감의 표현 같은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링 위의 상대를 쓰러뜨린 복서의 포효였을까요?

 

. 사람이 이렇게 죽는 것인가 보다. 울산 현대백화점 앞 십차선 도로는 그 순간 참으로 조용했습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뻗어있으니, 전경 둘이 겨드랑이를 한명씩 들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곤 한명이 아저씨 괜찮아요? ”아저씨 괜찮아요?“ 하며 흔들어 깨웁니다. 정신이 살짝 들었고 상황이 파악이 되기 시작했지만, 대답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정신이 들면 또 때리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죽은 척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살아있는 한 마리 짐승보다는, 죽어있는 아저씨 인간이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영화에서 본 그 장면 당신은 000죄목으로 체포되었습니다.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뭐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 그건 역시 영화인가보다. 현실엔 없는 이야기구나.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긴 그건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마리 짐승에겐 참 어울리지 않는 대사인 것이죠.

 

창살이 있는 경찰서 봉고차 같은 것에 올라탔습니다. 이미 전의를 상실했고, 충분히 부상당해서 아무런 기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탈출이 우려되었던 것일까요? 차량에 오르자마자 뒤통수를 때려댑니다. ‘머리를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머리를 들면 안 되는 것일까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인생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날의 범죄가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도대체 날 때리는 놈 얼굴이나 보아두자 싶어 고개를 들다가 목이 부러지도록 더 얻어맞고는 어차피 난 사람 얼굴 잘 기억도 못하는데 포기하자 생각을 했습니다.

 

호송차량에서도 영화 속 대사는 듣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머리를 숙이지 않은 죄목으로 체포되었습니다.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가리는 들지 마라.

 

고분고분 잠자코 머리를 숙이고 있으니 아까 얼굴을 힐끗 본거 같은 나이 든 형사가 묻습니다, “넌 어디서 왔냐물었고, “대학생인데요답하니 다시 뒤통수를 후려칩니다. 변호인의 조력 없이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아서 멍청하다고 때린 것일까요? 뭐가 그리 화가 났는지, 대학생이란 말을 듣자 연타를 갈겼습니다. 대학생인 놈이 변호인의 조력 없이 묵비권을 행사할 지도 모른다고 때린 것일까요? 아 아니다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 짐승이 말을 하니 놀라서 때린 것 일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마 그런 거 같습니다.

 

어쨌든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죄인들은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앞사람 허리에서 손을 놓으면 죽는다는 살해협박을 받으며 경찰서를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사람씩 수사관이 배정되었고, 책상 앞에 앉으니 비로소 경찰이 말해줍니다.

 

당신은 000법 위반 등으로 체포되었습니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고,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어쩌구 저쩌구

 

감격스러웠습니다. 아 이제 사람이 되나보구나. 눈물이 흐를 것 같았습니다. 그래 내가 알고 보면 사람이었어. 한 마리의 아름다운 호모사피엔스란 말이야. 그렇지만 뭐랄까요? 변호인을 불러달라거나, 진술을 거부하겠다거나 하는 말을 함부로 꺼낼 순 없었습니다. 봉고차의 아저씨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또 뒤통수를 후릴 것 같았고, 방패와 곤봉이 나타나 한 마리 더 잡자고 달려들 것 같았습니다.

 

이십 년.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체포과정의 인권은 요즘 어떨까요? 집회 및 시위를 대하는 공권력의 태도는 여전히 말 안 듣는 짐승을 다루는 것과 같은 태도일까요? 다만 동물복지의 일환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항하지 않는 피의자를 폭행하거나 사적인 질문을 하고서는 기분이 나쁘다고 린치를 행하는 일들은 이제 일어나지 않는 과거의 모습이 되었을까요? 이유 없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그러한 세대가 지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만 이 사회가 보장해야 할 인권의 수준이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에 대해 강의하는 박노자씨가 그런 이야기를 전해 준적이 있습니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초등학생들이 모여서 피켓을 들고 데모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러시아 출신인 박노자씨는 신기해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합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왜 이렇게 시위를 해도 되는 것이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 했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처럼 약한 사람들은 어떻게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집회와 시위를 약자의 소통 방식으로 보는 나라와 사회 불순 세력으로 보는 나라의 차이일 것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다소 과격한 시위가 벌어졌다하여, 그들을 짐승처럼 취급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상식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마리 짐승으로 잡혀가던 그 즈음. 티비에는 부쩍 법과 원칙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티비에서 그 단어가 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옛날이야기들이 떠올랐나 봅니다. ‘법과 원칙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개개의 국민들에게 인간으로써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법과 원칙일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더더욱 성장한 인권국가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참, 덧붙여 아직도 싸우는 미얀마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꽃이 피길 기도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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