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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에세이] 부지런함에 대하여

인권옹호팀 양성민 | 2022-11-14 | 조회수 : 327

부지런함에 대하여

 

20221113일 인권옹호팀 양성민

 

까까머리 중학교 사회시간에서 생산의 3요소란 걸 배웠습니다. 요즘의 아이들은 어떻게 배우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습니다. 생산의 3요소란 토지, 자본, 노동을 말합니다. 이 세 요소를 결합시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을 생산이라고 배웁니다. 경제활동의 토대이며 국가와 사회 시스템의 출발이 되는 셈이지요.

 

생산의 과정에 토지를 제공하는 사람을 지주라고 했습니다. 자본을 제공하는 사람을 자본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을 노동자라고 부릅니다.

 

노동자(勞動者)는 개념어입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지식을 간결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노동자는 노동을 제공하는 자라는 말이지요. 나라마다 노동자라는 단어는 다르게 표현하지만 그 의미는 동일할 것입니다. ‘레이버이든 워커이든 아르바이트이든, 노동은 노동일뿐이고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입니다. 책상은 책상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그 뿐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유독 근로자’(勤勞者)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근로자란 굳이 해석한다면 힘써서 노동하는 사람또는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노동자를 영어로 worker라고 표현한다면 근로자는 어떻게 표현하면 되는 것일까요? hard worker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왜 우리 사회의 일부에서는 노동자라는 개념 앞에 굳이 부지런함이란 수식어를 반드시 붙이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색하지 않은가요? ‘여인이라는 용어 앞에 히잡을 쓴 여인이라고 붙여야 단어가 형성된다고 주장하는 식의 그런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은가요?

 

어떤 이들은 노동자라는 용어는 정치적 좌파들의 용어라고 주장하며 근로자라는 말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1946년부터 간행된 북한 노동당 최초의 당 기관지의 명칭이 근로자라고 합니다. 북한 헌법에도 근로자, 근로대중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합니다. ? 북한 노동당은 정치적 우파였던가요? 근로자와 노동자란 용어에 정치적 의미가 포함되었다고는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왜 노동앞에 부지런함이란 수식을 붙이게 되었을까요. 짧은 역사 지식이지만 저의 추측에는 농경사회의 오랜 문화에서 전해져 온 것이라고 봅니다. 농경 사회에서 성실한 노동은 가정을 지키고 국가를 운영하는 근본이었습니다. 농경사회를 중심으로 한 오랜 역사는 농민들의 성실한 노동을 기반으로 유지되었고, 왕족과 양반과 같은 지배층 또한 그들의 생산에 기대어 권세를 누렸습니다.

 

부지런함에 대한 높은 평가는 경복궁 궁궐 이름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지은 궁궐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왕의 집무실 이름을 근정전’(勤政殿)이라고 지었습니다. ‘부지런하게 정치한다. 부지런하게 다스린다는 임금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한국역사에 부지런함이란 농민에게 양반귀족에게 심지어 왕에게도 필요한 덕목이 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어록인 법구경의 한 구절은 부지런함은 생명의 길이요, 게으름은 죽음의 길이다, 부지런한 사람은 죽지 않지만, 게으른 사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구절이 있고, 경전 곳곳에서 부지런함을 권장하고 게으름을 극복할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역사에는 오래 전부터 근로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노동이라는 단어와 함께 오랫동안 사용되었습니다. 방송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이미 근로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대사회가 더 이상 농경사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산업사회의 노동자들에게도 부지런함이란 수식어를 붙여 그들을 계도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초단위로 계산되어 통제되는 분업시스템과 기계가 나인지 내가 기계인지 모를 컨베이어시스템은 이미 인간을 하나의 공장부속품처럼 다루어 왔습니다. 아이들도 여성들도 노인들도 모두 하루 16시간의 공장노동을 하며 숱하게 죽어간 역사가 바로 근현대 산업사회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까지 굳이 노동자는 무릇 부지런한 것이다는 수식을 가져다 붙이는 건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생존의 위기에서 부지런함으로 땅을 일구어 재화를 만들어내던 시대와 달리 현대산업사회는 상품 이전에 욕망을 생산해 내는 사회로 변모한지 오래입니다. 모든 기업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욕망을 생산하고 상품 소비를 통해 욕망의 충족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과도하리만치의 욕망이 지배하는 이 도시들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경제활동에 매진하며 욕망을 해소하기에 바쁜 나날들을 살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우린 이미 너무 부지런합니다. 한국은 심지어 세계최장의 노동시간과 과로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하루 6명이 일터에서 산재로 죽어가고 있으며 산업재해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과도한 노동시간에 따른 과로에 있습니다. 이러한 산업사회에 노동자들에게 부지런함을 요구하는 것이야 말로 시대착오적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행위라 생각됩니다.

 

1113일 전태일 열사의 희생을 추모하고 노동법 개정을 요구하는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와중에 정부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노동자라는 단어를 근로자라는 단어로 수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하루 16시간을 다락방 공장에서 근무하고 중학교에 가서 친구들처럼 교복입고 가방을 매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어린 여공들, 이들에게 하루 8시간 노동을 지켜 달라고 분신한 스무 살 청년의 정신을 기리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을 앞두고, 노동자는 부지런해야 노동자라고, 이름이 잘못되었다고, 교과서를 고쳐야 된다고 주장하는 이 계획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부지런함은 단지 삶의 태도이며, 그 삶의 태도는 개인이 선택할 사항일 뿐입니다. 왕이든 신하이든 기업가이든 노동자이든 스스로 선택할 삶의 태도이지 개체의 본질은 아닌 것이지요.

 

우리 사회의 일부 지식인들은 노동 앞에는 부지런함이란 수식어를 붙여야 하며, 민주주의 앞에는 리버럴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하고, 성소수자와 성평등 용어는 삭제하는 것이 올바른 교육의 모습이라 믿고 있나 봅니다. 정말 그런가요.

 

책상은 안타깝지만 그냥 책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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